전기차 충전·업무추진비 등 사용처·기한·한도 반영한 국고금 실증
한강·아고라 직접 연결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토큰 인프라 연계 가능성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 2단계는 ‘예금토큰이 작동하는가’를 묻는 단계를 지나, ‘어떤 조건을 건 돈이 실제 현장에서 집행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실험의 초점은 결제 자체보다 자금의 목적, 사용처, 기한, 한도 등 공공자금 집행 조건을 디지털 인프라에 어떻게 반영하느냐에 맞춰져 있다.
적용 대상도 더 구체적이다. 전기차 충전, 업무추진비, 관서 운영경비처럼 사용 목적과 집행 범위가 비교적 명확한 사업이 우선 검토되고 있다. 예컨대 전기차 충전 사업이라면 해당 충전 목적에 맞는 가맹점이나 인프라에서만 자금이 쓰이도록 제한하고, 업무추진비라면 사용 가능한 업종과 한도, 기한 등을 시스템에 반영하는 식이다.
이는 디지털 원화 논의가 단순한 지급수단 실험에서 공공자금 집행 방식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에는 자금 집행 이후 증빙과 감사를 통해 적정성을 확인했다면, 예금토큰 기반 인프라에서는 자금이 쓰이는 순간 조건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 가능해진다.
2단계 핵심은 기술 검증보다 ‘사업 맞춤형 구현’
한은 관계자는 이번 2단계 사업에 대해 “특정 기술 하나를 정해 검증하는 단계라기보다는 실제 사업에 맞춰 구현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기차 충전 사업이나 업무추진비, 관서 운영경비 등 사업별 목적에 맞게 사용처, 기한, 한도 등을 반영해 인프라를 마련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핵심은 블록체인 기술 자체의 성능을 다시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실제 재정 사업마다 다른 조건을 예금토큰 인프라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기존 행정·결제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사업별 목적에 맞춘 결제 제한, 사용 기한 설정, 한도 관리, 사용처 확인 등이 주요 구현 대상이 된다.
한은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 사업의 경우 해당 목적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처를 제한하는 방식이 될 수 있고, 업무추진비라면 식당 등 실제 사용처에 맞는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며 “블록체인 기술과 한은 시스템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을 실제 사업에 맞게 적용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 같은 구조가 적용되면 공공자금 집행 과정도 일부 달라질 수 있다. 보조금이나 업무추진비는 일반적으로 집행 이후 증빙과 감사를 통해 적정성을 확인하지만, 조건부 지급 구조에서는 자금이 쓰이는 시점에 사용 목적과 한도, 기한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부적절한 사용을 사후에 찾아내는 방식에서, 애초에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쓰이도록 설계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만, 국고금 실증이 곧바로 실제 재정 집행 체계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산 집행 권한, 회계 처리, 감사 기준, 개인정보 처리, 민간 사업자의 데이터 제공 책임 등이 함께 정비돼야 한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제도적으로 허용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금융시장 인프라 확장, 기술보다 제도 정합성이 관건
프로젝트 한강의 구조가 향후 금융시장 인프라로 확장될 경우 국채 토큰화도 주요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국채는 금융시장의 핵심 안전자산이자 담보, 환매조건부채권(RP) 거래, 공개시장운영 등 중앙은행 업무와 밀접하게 연결된 자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토큰화 증권 인프라 논의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1월 토큰증권 제도화 방안을 발표하며 분산원장 기반 증권 발행·유통 관리 체계와 디지털 금융표준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도 금융감독원, 금융투자협회 등과 함께 관련 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다.
다만, 국채 토큰화는 단순히 채권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는 문제가 아니다. 법적 소유권, 결제완결성, 회계 처리, 전자증권 제도와의 정합성, 기존 예탁결제 인프라와의 연결 방식이 함께 정리돼야 한다.
토큰화 국채가 중앙은행 화폐나 예금토큰과 연결될 경우 증권과 대금을 동시에 교환하는 원자적 결제, 담보 관리 자동화, RP 거래 효율화 등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금융시장 인프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전자증권법상 권리 이전 방식, 기존 예탁결제 체계와의 관계, 결제완결성 인정 범위, 장애 발생 시 책임 소재 등이 명확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채 토큰화 논의는 프로젝트 한강의 당장 실증 대상이라기보다, 예금토큰과 기관용 CBDC 구조가 금융시장으로 확장될 때 검토해야 할 다음 과제에 가깝다. 프로젝트 한강이 공공자금 집행에서 실제 적용성을 확인한다면, 이후 금융시장 영역에서는 기존 제도와의 접점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 될 전망이다.
한강과 아고라, 현재는 별개…장기적으로는 같은 토큰 인프라 흐름

국경 간 결제 영역에서는 프로젝트 아고라가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 아고라는 국제결제은행(BIS)과 국제금융협회(IIF)가 주도하는 민관 협력 프로젝트로,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을 활용해 도매 국가 간 결제의 비효율을 줄이는 실험이다.
프로젝트 한강과 아고라는 현재 직접 연결된 하나의 사업은 아니다. 한강은 국내 실거래와 국내 디지털화폐 인프라 활용성을 검증하는 프로젝트고, 아고라는 여러 국가의 중앙은행과 민간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다.
한은 관계자는 “현재 한강 프로젝트와 아고라 프로젝트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같은 틀에서 진행되는 부분이 있다”며 “예금토큰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를 연결해 토큰 인프라를 만드는 구조라는 점에서 향후 연결 가능성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고라가 더 구체화되고 인프라가 만들어지면 토큰화된 예금과 다른 나라 인프라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며 “국가 간 인프라 연결은 결국 그런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 아고라는 현재 초기 프로토타입 개발을 마치고 후속 단계 준비가 진행 중으로 알려졌다. 한은 관계자는 “아고라는 1차 사업을 통해 기본적인 프로토타입이 나온 상태이고, 다음 단계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국내에서도 주요 은행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실제 연결 방식이나 시기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두 프로젝트가 같은 방향의 토큰 인프라 논의와 맞닿아 있더라도, 이를 실제로 연결하려면 각국 지급결제 제도, 외환 규제, 참가 기관 간 표준, 결제완결성 등 복잡한 과제를 풀어야 한다.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는 통화의 국제적 활용도가 기존 외환시장뿐 아니라 결제 인프라의 연결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원화가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와 예금토큰 형태로 국경 간 결제망에 연결된다면, 원화 국제화 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중앙은행의 역할, 발행자에서 인프라 설계자로
프로젝트 한강 2단계의 의미는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예금토큰과 기관용 CBDC 구조가 실제 공공자금 집행과 금융시장 인프라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 있다.
한은이 3월 발표한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추진 자료에서도 국고보조사업에 예금토큰을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BIS 역시 프로젝트 아고라 보고서를 통해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을 결합한 국경 간 결제 인프라의 가능성을 검증했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 제도화까지는 별개의 문제다. 국고금 집행은 재정·회계 규정과, 국채 토큰화는 전자증권·채권 결제 제도와, 아고라 프로젝트는 외환·국제결제 체계와 맞물려 있다. 프로젝트 한강의 다음 과제는 디지털 원화 인프라를 어디까지 연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연결을 어떤 제도 안에서 관리할 것인지 확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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