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토큰 ‘소각·재발행’으로 화폐 단일성 유지…예금보험·지급준비 틀 안에 편입
하반기 국고금 집행 실증 착수…국채 토큰화·프로젝트 아고라 연계도 추진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유럽중앙은행(ECB) 중앙은행 포럼에서 한국의 디지털화폐 실험인 ‘프로젝트 한강’을 통합원장 기반 금융 인프라의 실제 구현 사례로 제시했다. 유럽이 통합원장 기반 토큰화 도매금융 인프라 구상인 ‘아피아(Appia)’를 준비하는 단계인 가운데, 한국은 예금토큰을 활용한 대규모 실거래 실증을 이미 진행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은은 향후 예금토큰을 넘어 국고금 집행, 국채 토큰화, 국경 간 결제까지 실증 범위를 넓힌다는 구상이다.
신 총재는 1일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중앙은행 포럼’ 세션에서 ‘통합원장의 실제 구현: 프로젝트 한강의 교훈(A unified ledger in practice: lessons from Project Hangang)’ 논문을 발표했다. 해당 세션은 화폐와 지급결제, 금융거래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토큰화가 가져올 기회와 과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유럽은 청사진 단계…프로젝트 한강은 실거래 실증
논문은 ECB의 아피아(Appia) 구상이 2028년까지 유럽의 통합원장 기반 토큰화 도매금융 생태계 청사진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프로젝트 한강을 중앙은행 화폐, 상업은행 예금, 토큰화 자산을 하나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원장 위에서 연결하는 실제 구현 사례로 제시했다.
프로젝트 한강은 기존 금융시스템의 핵심인 이원적 통화체계를 유지하되, 지급과 결제, 자산 이전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점이 핵심이다.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 토큰화 자산이 분리된 시스템에서 각각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통합원장 위에서 상호 연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프로젝트 한강 1단계 실험은 2025년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됐다. 약 8만 명의 이용자와 1만2000개 가맹점이 참여했으며, 일반 결제와 개인 간 송금, 조건부 디지털 바우처 등 실제 이용 환경에서 예금토큰 활용 가능성을 점검했다. 논문은 이 실험이 통제된 실험실 환경이 아니라 대중이 참여한 실거래 환경에서 진행됐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예금토큰, ‘소각·재발행’으로 화폐 단일성 유지
한은이 강조한 설계 요소는 ‘소각·재발행(burn-and-issue)’ 구조다. 이용자가 다른 은행 고객에게 예금토큰을 보낼 경우 송금은행의 예금토큰은 소각되고, 은행 간 결제는 중앙은행 화폐로 처리된 뒤 수취은행에서 다시 예금토큰이 발행된다. 이를 통해 은행이 달라도 예금토큰의 가치는 항상 1원은 1원으로 유지되고, 화폐의 단일성이 보존된다는 설명이다.

예금토큰을 기존 예금과 같은 제도권 틀 안에 두려는 점도 특징이다. 논문은 예금토큰이 상업은행 화폐의 한 형태로서 신용창출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사용자 보호 측면에서는 금융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예금보험 체계가 예금토큰까지 확장됐고, 지급준비와 관련해서도 예금토큰을 기존 은행 부채와 유사하게 취급하는 방향이 제시됐다.
한은은 프로그래밍 기능이 화폐의 가치 자체를 바꾸지 않도록 ‘화폐 계층’과 ‘프로그래밍 계층’을 분리했다. 화폐 계층은 가치 이전과 등가성을 담당하고, 프로그래밍 계층은 사용처, 기간, 조건 등 제한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조건부 지급 기능을 구현하더라도 예금토큰의 화폐적 성격과 대체 가능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하반기 국고금 집행 실증으로 확대
2단계 실증은 올해 하반기 국고금 집행 분야로 확대된다. 대상은 전기차 충전 인프라 보조금과 공공부문 업무추진비다. 한은은 자금의 사용처와 기간, 자격 요건을 사전에 설정하고 조건을 충족할 때만 자금이 집행되는 구조를 검증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보조금 집행과 업무추진비 사용을 사후 감사 중심에서 사전 검증 중심으로 바꿀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전기차 충전 인프라 보조금 실증에서는 외부 데이터를 스마트계약과 연계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충전기 운영 상태 등 외부 정보를 오라클을 통해 불러와 자금 집행 조건을 자동으로 확인하는 방식이다. 논문은 이 모델이 향후 정부 조달, 하도급 관리, 단계별 계약 이행 대금 지급 등 다양한 정부·기업 간 거래로 확장될 수 있다고 봤다.
다음 과제는 국채 토큰화와 프로젝트 아고라 연계
프로젝트 한강의 다음 확장 축은 국채 토큰화다. 한은은 중앙은행 화폐와 예금토큰뿐 아니라 국채 같은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자산도 통합원장 위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채가 토큰화되면 담보 적격성 확인, 담보 가치 변동에 따른 자동 마진콜 대응, 환매조건부채권(RP) 만기 상환 등을 스마트계약으로 처리할 수 있다.
논문은 이러한 구조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금융안정 기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앙은행이 참가자의 자금 포지션과 고품질 담보 보유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고, 공개시장운영이나 일중 유동성 공급을 스마트계약 기반으로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경 간 결제와의 연계도 과제로 제시됐다. 한은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추진하는 프로젝트 아고라와 프로젝트 한강의 연결 가능성을 검토할 계획이다. 프로젝트 아고라는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을 활용해 국가 간 도매 결제의 비효율을 줄이는 실험이다. 한은은 프로젝트 한강이 아고라와 연계될 경우 외환 결제와 증권 결제를 하나의 거래로 묶는 원자적 결제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상용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논문은 기존 거액결제시스템인 한은금융망(BOK-Wire+)과 디지털화폐시스템(DCS)의 상호운용성, 운영시간 차이, 대규모 거래 처리 능력, 토큰화 자산의 실제 거래 적용 등을 향후 과제로 꼽았다.
신 총재는 프로젝트 한강이 단순한 CBDC 실험을 넘어 중앙은행 신뢰를 기반으로 한 토큰화 금융 인프라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은은 단계적 실증을 통해 예금토큰, 국고금, 국채, 국경 간 결제를 잇는 중앙은행형 통합원장 모델을 구체화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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